오사카 대공습은 1945년 3월부터 8월까지 총 8차례에 걸쳐 오사카 시를 대상으로 한 연합군의 공습을 의미한다. 특히 1945년 3월 13일과 14일에 걸쳐 진행된 제1차 대공습으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공습으로 오사카 시는 큰 피해를 입었다. 8월 14일의 교바시역 공습에서는 교바시역에 폭탄이 떨어져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오사카 대공습은 여러 문학 작품과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으며,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 배상 소송을 제기했으나 기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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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사망자 10,000명 이상 (대부분 일반적인 추정치) 50만 명 이상의 이재민 발생
2. 배경
오사카는 1940년 당시 인구 3,252,340명으로 일본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전통적으로 극동 지역의 주요 산업 중심지였으며, 조선, 철강, 철도 차량, 비철금속(특히 구리 및 알루미늄) 등 중공업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또한 항공기 프로펠러 및 프로펠러 조속기, 군수품, 섬유, 특수강, 전선, 전기 장비, 화학 물질, 기계 및 공작 기계, 특히 베어링 생산으로도 유명했다. 오사카는 교통의 중심지이자 일본에서 세 번째로 큰 항구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얕은 항구를 개발하기 위한 많은 노력과 함께 일본 철도 네트워크의 중심지이기도 했다.[2]
1945년 3월 13일 23시 57분부터 3월 14일 03시 25분까지 약 3시간 30분 동안 274대의 B-29 중폭격기가 오사카를 공격했다.[3] 제314 항공 사단 소속 폭격기 43대가 괌에서 출발하여 고도 약 2,000m의 저고도 야간 공습을 실시했다. 첫 번째 폭격기들은 미나토구에 소이탄을 투하하여 화재를 일으켰고, 제313 항공 사단 소속 폭격기 107대는 티니안에서 출발하여 나니와구를, 마지막으로 사이판에서 출발한 제878 폭격 비행대 소속 폭격기 124대가 기타구와 니시구를 공격했다. 이 폭격으로 3,987명이 사망하고 678명이 실종되었으며, 도시의 8.1제곱마일 (21km2)이 파괴되었다.[4] 이 과정에서 B-29 폭격기 2대가 손실되었다.[5]
3월 13일과 14일 심야 대공습 당시, 지하철은 이미 영업을 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신사이바시역, 혼마치역,[6]다이코쿠초역 등에서 전차를 타고 피난했다는 증언이 복수로 존재한다.[7]1997년아사히 신문에 교토 대학 명예교수 무라마츠 시게루가 신사이바시역에서 전차를 타고 우메다로 피난한 체험담을 게재하면서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8]
오사카시 교통국노동조합 (오사카 교통 노동조합)이 조사에 나섰으나, 전쟁 말기 자료가 거의 없어 당시 증언을 수집했다.[9]마이니치 신문은 1997년 7월 기사를 통해 정보 제공을 호소했고, 같은 해 10월 조사 결과와 분석을 게재했다. 조합은 1998년 3월 기관지 '다이코'에 두 차례 기사를 게재했다.[10]
마이니치 신문에 따르면, 전차를 탄 시간대는 오전 3~4시경과 5시 전후로 나뉜다. 신사이바시 주변에서 역으로 피신한 사람들은 "우메다 쪽은 불타고 있지 않다"는 유도를 받고 승차했고, 공습 직후 역 구내에 들어간 사람들은 "첫 전차가 나온다"고 하여 승차했다(이쪽은 덴노지역행을 탔다는 증언도 있다). 역 구내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경위는 "헌병이 안으로 들어가도록 지시했다"(신사이바시역), "역원을 설득하여 셔터를 열게 했다[11]"(다이코쿠초역), "폐쇄되어 있어야 할 셔터가 열려 있었다"(혼마치역) 등 다양했지만, 역원의 판단으로 피난하게 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다이코' 기사에서는 당일 역이나 열차에서 근무한 직원의 증언은 얻을 수 없었지만, 다음 날 출근했던 관계자들은 "특별한 일이 있으면 업무 인계 시 반드시 보고가 있지만, 그런 화제는 나오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당일 신사이바시 변전소에 근무했던 직원은 "지시가 있어서 전차를 움직이는 전기를 계속 보냈다"고 증언하여, 전차를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었음이 밝혀졌다.[12] 피난 열차에 대해 운전사 조장이었던 전 직원은 "5시가 넘은 첫차 아니면, 첫차 전에 직원을 태우고 달리는 '송영 전차'였을까요"라는 추측을 내놓았다.
1998년 NHK는 '열도 릴레이 다큐멘터리'에서 "공습의 밤 지하철은 달렸다"는 제목으로 방송했고,[13]2007년 후지 텔레비전은 NONFIX에서 "천의 바람 프로젝트 오사카 대공습의 밤 지하철은 달렸는가"라는 제목으로 다루었다.
1997년 조사에 참여했던 조합 내 공영 교통 연구소 담당자는 2009년 신문 기사에서 "보고만 있을 수 없어 피해자를 역에 넣고, 송영 전차 등에 태웠을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직무 위반 우려가 있어, 이야기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14] 이 지하철 피난은 NHK 연속 텔레비전 소설 '고치소상' (2014년 3월 4일 방송분)에서 묘사되었고, '너무 심한 도시 전설 스페셜 2015 가을' (2015년 9월 23일 방송분)에서도 다루어졌다.
3. 2. 제2차 오사카 대공습 (1945년 6월 1일)
1945년 6월 1일, B-29 521대와 P-51 148대가 오사카를 목표로 주간 공습을 감행했다. 오사카로 향하던 중 P-51D 머스탱 전투기 27대가 짙은 구름 속에서 충돌하여 파괴되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B-29 458대와 P-51 27대가 오사카에 도달, 폭격으로 일본인 3,960명이 사망하고 8.2제곱킬로미터의 건물이 파괴되었다.[1]
1945년 6월 1일 오사카 상공의 B-29
이 공습은 1945년 6월 1일 9시 28분부터 11시까지 약 1시간 30분 동안 진행되었다.[1] 총 509대의 B-29가 오사카항과 안지강 우안의 임항 지구, 성남의 육군 시설 주변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1] 미국군은 후쿠시마역 부근, 후쿠시마구 다이카이초, 아지카와구치역 부근, 미나토구·오사카 시립 운동장(현재의 야하타야 공원), 다이쇼구 후쿠마치(현재의 쓰루마치 5초메), 히가시구(현 주오구) 우에마치, 시노노메초, 모리노미야·다마쓰쿠리 주변, 기타구 남부를 중심으로 오사카시 서부 8.2제곱킬로미터에 피해를 입혔다.[1] 이 공습으로 미나토구와 다이쇼구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1] 또한 P-51이 처음으로 내습하여 기관총 소사를 실시했다.[1]
3. 3. 제3차 오사카 대공습 (1945년 6월 7일)
1945년 6월 7일, B-29 폭격기 409대가 오사카를 재공습하여 5.7㎢ 면적의 건물이 불탔으며, 미군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1] 이 공습에서 소이탄 공격은 미야코지마구 다카쿠라마치, 쓰루하시역 부근, 텐노지역 부근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1] 또한, 조토에 있는 오사카 육군 조병창을 목표로 대형 폭탄이 투하되었으나, 폭탄은 목표를 크게 벗어나 시가지에 떨어졌다. 이로 인해 나가라바시가 직격당했고, 다리 아래로 피난했던 약 400명의 시민이 희생되었다.[1] 시바지마 정수장도 파괴되어 상수도 공급이 중단되었다.[1]
게이한신 급행 전철은 신요도가와 교량에서 주소역 부근까지 폭격 피해를 입어, 신케이한선의 우메다역 직통 운행이 중단되었고, 고베선만 저녁부터 운행을 재개했다.[1]
아사히구의 조호쿠 공원에는 근처 섬유 공장에 시코쿠에서 근로 동원된 여학생들을 비롯한 많은 주민들이 피난해 있었으나, 기총 소사를 집중적으로 받아 수백 명에서 천 명으로 추정되는 희생자가 발생했다.[1]
3. 4. 제4차 오사카 대공습 (1945년 6월 15일)
1945년 6월 15일, B-29 폭격기 444대가 오사카를 네 번째로 폭격하여 도시의 4.9㎢와 인근 아마가사키의 1.5㎢를 파괴했다. 이 공습으로 오사카에서만 30만 채의 가옥이 파괴되었다.[1]
1945년 6월 26일, 중요 공업 거점을 정밀 폭격하는 것이 목표였다. 미국군의 조준점은 고노하나구 기타코의 스미토모 금속(현재의 일본제철) 제강소와 오사카 육군 조병창(포병 공창)이었다. 스미토모 금속에는 폭탄이 명중했으나, 포병 공창에 투하된 폭탄은 그 주변부에 피해를 입혔다.
3. 6. 제6차 오사카 대공습 (사카이 대공습, 1945년 7월 10일)
1945년 7월 10일 1시 33분부터 3시 6분까지 약 1시간 반에 걸쳐 사카이시를 표적으로 한 '''사카이 대공습'''이 진행되었다.
이 공습은 오사카시를 표적으로 삼았던 다른 공습과는 달리, 일본과 미국 모두 사카이시를 표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종전 직후 제작된 『전재 개황도 오사카』에는 "제6차는 사카이시 공격"이라는 주석이 붙어 있어 제6차 오사카 대공습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다만, 오사카시를 표적으로 삼은 공습으로 보지 않는 자료도 있어, 이 경우 7월 24일의 공습을 제6회, 8월 14일의 공습을 제7회로 계산하므로 주의해야 한다.
사카이 대공습 전날 심야부터 당일 새벽에는 와카야마 대공습 (테니안 섬에서 출격)도 이루어져, 오사카만 연안의 남부 두 주요 지방 도시(중소 도시)가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가 되었다.
중소 도시 폭격 작전의 일환으로, 사이판 섬 아이즐리 비행장 제73항공단의 B-29 116기가 사카이시 중심부에 약 1만 3,000발(778.9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는 오사카시 중심부를 노린 제1회 공습 이후 첫 야간 공습이었다. 사카이시에서는 2.64km2가 피해를 입었으며, 약 5만 5,000명이 피해를 보았다. 이 공습으로 사망자 1,370명, 중경상자 1,472명, 행방불명자 3명, 가옥 전소 및 반소 14,797호의 피해가 발생했다. 또한, 사카이시에 인접한 오사카시 스미요시구 (현 스미노에구 포함)와 이즈미오쓰시, 기시와다시, 가이즈카시에서도 피해가 발생했다.
3. 7. 제7차 오사카 대공습 (1945년 7월 24일)
1945년 7월 24일, 스미토모 금속 공장 및 오사카 육군 조병창을 목표로 폭격이 이루어졌다. 117기가 기즈가와 비행장 및 이타미 비행장(현재의 오사카 국제공항)을 폭격한 후, 각각 스미토모 금속 공장 및 오사카 육군 조병창으로 향했다. 그러나 오사카 육군 조병창으로 향한 비행기 중 일부는 조병창에 폭격을 실시했으나, 대부분은 상공의 시계 불량 및 기상 악화로 폭격을 포기하고 예비 공격 목표였던 미에현 쿠와나시로 향하여 쿠와나 공습을 일으켰다.[1]
3. 8. 제8차 오사카 대공습 (교바시역 공습, 1945년 8월 14일)
1945년8월 14일,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전날, 145대의 B-29가 오사카를 공습했다.[1] 이 폭격기들은 동오사카에 있는 일본 육군 공장을 목표로 약 700개의 1톤 폭탄을 투하했다. 일본국유철도 교바시역에도 1톤 폭탄 4발이 떨어져 민간인으로 가득 찬 역에 큰 피해를 입혔다. 이 공습은 "'''교바시역 공습'''" 또는 "'''교바시 공습'''"이라고도 불린다.
오사카 육군 조병창에 대한 폭격은 이전까지 실패했지만, 이 공습으로 조병창은 괴멸되었다. 오사카성 내에도 폭탄이 떨어져 2번 망루, 3번 망루, 곤 망루, 후시미 망루, 교바시구치 다몬 망루가 불에 탔고, 돌담 일부가 무너지는 피해도 발생했다. 조병창 북동쪽에 위치한 교바시역 주변에는 같은 날 13시경, 1톤 폭탄 4발이 떨어졌다.
마침 교바시역에는 조토선(현재의 오사카 순환선) 상행 열차와 하행 열차 2대가 들어와 있었다. 많은 승객들이 입체 교차하는 아래층의 가타마치선 플랫폼으로 피난하고 있었는데, 1톤 폭탄 1발이 고가 위의 조토선을 뚫고 가타마치선 플랫폼에 떨어져 폭발했다. 피난하던 승객들이 폭탄의 직격을 받았다. 이 공습으로 희생된 사람 중 신원이 확인된 사람만 210명 이상이고, 신원불명의 희생자가 500 - 600명 이상(유해의 손상이 심해 정확한 희생자 수는 불명)으로 추정된다.
1955년부터 매년 8월 14일에 교바시역 남쪽 출구(조토구 신키타)에서 위령제가 열리고 있다.[14] 위령제에 처음부터 관여해 온 오사카시 아사히구의 묘견각사[15]는 후세에 기억을 전하기 위해 공습 체험자나 유족의 증언을 영상으로 남기는 노력을 시작했다.[16]
교바시역 남쪽 출구의 오사카 대공습 교바시역 폭격 희생자 위령비(조토구 신키타)
4. 오사카 대공습의 결과
오사카 대공습으로 3,987명이 사망하고 678명이 실종되었으며, 도시의 21km2가 파괴되었다.[1] 1945년 3월 13일 첫 공습에서는 274대의 B-29 중폭격기가 투입되어 3시간 30분 동안 오사카를 공격했다. 괌에서 출발한 제314 항공 사단 소속 폭격기 43대가 미나토구에 소이탄을 투하하여 화재 폭풍을 일으켰고, 티니안에서 온 제313 항공 사단 폭격기 107대는 나니와구를, 사이판에서 온 폭격기 124대는 기타구와 니시구를 공격했다.
6월 1일에는 521대의 B-29와 148대의 P-51이 오사카를 주간 공습했다. 짙은 구름 속에서 P-51D 머스탱 전투기 27대가 충돌로 파괴되었지만, 458대의 중폭격기와 27대의 P-51이 오사카에 도달하여 3,960명의 사망자와 8.2km2의 건물 파괴를 야기했다. 6월 7일에는 409대의 B-29가 다시 오사카를 공격하여 5.7km2의 건물을 불태웠다. 6월 15일, 444대의 B-29에 의한 네 번째 폭격으로 오사카의 4.9km2와 인근 아마가사키의 1.5km2가 파괴되었고, 오사카에서 30만 채의 가옥이 파괴되었다.
7월 24일, 625대의 B-29가 나고야와 오사카 인근의 7개 목표 지점을 공격했다. 7월 6일 밤에서 7월 7일 밤 사이에는 제315폭격비행단이 오사카 인근의 마루젠 정유소를 파괴했고, 3일 밤 뒤 우쓰베 정유소 파괴를 완료했다.
1945년 8월 14일, 전쟁이 끝나기 전날 145대의 B-29가 오사카를 공습하여 동오사카의 일본 육군 공장에 700개의 1톤 폭탄을 투하했다.[1]일본국유철도 교바시역에도 폭탄이 투하되어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공습은 "교바시역 폭격"이라고도 불리며, 확인된 민간인 사망자만 210명 이상, 신원 미상 500명 이상으로 집계되었다.
5. 오사카 대공습 이후
1955년부터 매년 8월 14일 교바시역 남쪽 출구(조토구 신키타)에서 희생자 위령제가 열리고 있다.[14] 오사카시 아사히구의 묘견각사는 후세에 기억을 전하기 위해 공습 체험자와 유족의 증언을 영상으로 남기는 노력을 시작했다.[15][16]
2008년12월 8일, 오사카 대공습의 민간인 피해자와 그 유족들은, 국가는 구 군인·군속에게는 원호 제도를 정비하고 있는 데 반해, 민간인 피해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원호도 하지 않고 방치해 왔으며, 일본국 헌법 제14조의 법 아래 평등에 위반된다고 주장하며,[17] 국가에 의한 피해 방치는 위법하다고 하여 1인당 1100만엔의 손해 배상과 사죄 등을 요구하며 오사카 지방 법원에 집단 소송을 제기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에 대한 공습과 관련하여 피해자로부터 소송이 제기된 것은, 2007년3월 도쿄 지방 법원에 제기된 도쿄 대공습 관련 소송에 이어 두 번째 사례이다.[18]2011년12월 7일 오사카 지방 법원은 "군인·군속 등과의 보상 차이는 국회의 재량으로 강구되었으며, 명백히 불합리하다고 할 수 없다"며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19]2013년1월 16일 오사카 고등 법원의 항소 판결은 국민의 수인 한도를 이유로 기각되었고, 최고 재판소에 상고했다.[17]2014년9월 16일까지 최고 재판소는 상고를 기각하여 원고 측의 패소가 확정되었다. (결정은 11일자)[20] 원고 측은 패소했지만, 오사카 공습 소송·변호단에서는 판결문 중에 "도망가지 말고 불을 꺼라"는 방공법과 "공습은 두려워할 필요 없다"는 정보 통제에 의해 국민이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는 등, 상세한 인정을 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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